기아의 플래그십 전기 SUV 'EV9'이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는 호평과 높은 판매 실적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지만, 정작 자국 시장인 한국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EV9은 전기 SUV 중에서도 높은 기술력과 완성도를 갖춘 모델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내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부담스러운 선택지로 비친다. 그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가격이다. EV9의 국내 판매가는 스탠다드 기준 6,412만원에서 시작하지만, 롱레인지 모델의 풀옵션 사양은 1억 원에 달한다.
고가의 차량인 만큼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과도 거리가 있다. 현행 정책상 차량 가격이 5,500만원을 초과하면 보조금이 대폭 삭감되거나 아예 지급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기차 혜택도 받지 못하는 고가 차량”이라는 인식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가격뿐만 아니라 품질 신뢰도 역시 발목을 잡았다. 출시 직후 램프 결함, 충전 시스템 오류, 후륜 모터 제어기 이상 등 각종 품질 문제가 연이어 제기되면서, 구매 초기부터 센터 방문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다. 소비자들이 프리미엄 차량에 기대하는 '완성도'를 EV9은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는 곧 브랜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한국은 전기차 수용에 있어 여전히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내연기관 차량이나 하이브리드 차량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전기차는 아직도 ‘불편한 미래의 기술’로 인식되곤 한다. 충전 인프라 부족, 겨울철 주행 거리 감소, 전기차 화재 관련 보도 등은 여전히 시장 불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기까지 큰 EV9은 ‘충전이 더 번거롭고 리스크가 큰 차’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충전 환경 역시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용량 배터리를 채택한 EV9은 초급속 충전 환경이 필수적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고속충전기 설치 비율이 낮다. 게다가 기아가 자체 개발한 통합충전제어장치(ICCU)에 대한 사용자 불만도 일부 존재한다. 충전 대기 시간의 길이, 접근성의 불편함 등은 고가 전기 SUV 소비자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국내 판매 과정에서의 운영 미숙도 소비자 불만을 키운 요소다. 일부 딜러의 소극적인 대응, 예약 시스템 오류, 재고 부족 등이 겹치며 고객 경험이 크게 저하됐다. 특히 사전예약 당시의 혼선은 구매를 고려하던 소비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프리미엄 제품에 기대되는 ‘관리 수준’과는 괴리가 있었다.
EV9은 기아가 글로벌 시장을 우선시하는 전략 아래 북미와 유럽에 생산 물량을 집중 배정하면서 국내에서는 일시적으로 주문이 중단되거나 재고가 부족한 상황이 반복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비자 혼란이 가중됐고, 현재는 연식 변경 모델(2026년형) 출시를 앞두고 있는 만큼, 시장 불확실성도 여전하다.
흥미로운 점은, EV9이 북미에서는 뚜렷한 수요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대형 3열 SUV의 수요가 높고, 가족 단위 캠핑이나 트레일러 견인 등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강하다. 이런 소비 행태는 EV9과 잘 맞아떨어지며, 시장에서 좋은 반응으로 이어졌다.
반면, 한국은 대형 SUV 자체의 수요가 제한적이고, 이를 전기차로 채우려는 시도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EV9은 기술력이나 차량의 완성도 면에서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모델이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가격 정책, 보조금 체계, 충전 인프라, 소비자 인식 등 여러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기아는 연식 변경을 계기로 가격 조정과 품질 개선, 충전 환경 개선, 마케팅 전략 강화 등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 과연 EV9이 국내 소비자와의 거리감을 좁히며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